7시간도 넘게 강의를 했다. 목이 너무 아프다. 아침부터 아팠다. 침을 꼴깍 삼킬 때마다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불안했다. 역시.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다. 분필가루를 너무 많이 먹었나. 아님 간밤에 켜둔 에어컨 때문이었나. 어쨌건 목이 까끌까끌해서 강의하기가 싫었다. 서술형 문제를 얼른 만들었다. 애들에게 엿을 먹였다. 영타치기가 귀찮았다. 한타를 쳤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하지만 나는 감기에 걸렸어요. 기침이 나고 열이 나요. 전화가 왔어요. 여보세요? 거기 Kate 있나요? 안녕 Tom? 너는 바이올린을 켤 줄 아니? 저는 바이올린은 켤 줄 알지만 실로폰은 못 쳐요'

영작하시오.

애들은 시험지를 받고 얼굴이 노래졌고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책을 봤다. 아니 책을 폈다. 책을 피자 편지가 나왔다.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사진을 봤다.

노트를 책상위에 두고 잠깐 복사지를 가지러 갔다 왔다. 학생 중 하나가 노트를 열어봤다. 얼른 뺏었다. 정색했다. 너는 남의 사생활을 그렇게 쉽게 침범하라는 교육을 받은 학생이냐고 했다. 애가 좀 놀랐다. 쪼끔 미안했다. 얘가 '선생님 근데 아무것도 못봤어요' 했다. 못보긴. 빌게이츠 할부로 컴퓨터사는 소리 하고 앉았다. 근데 어쩌겠나. 정말 아무것도 못봤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껌뻑이는데. 알겠다고 들어가라고 했다. 대신 걔는 틀린 거 20번 쓰라고 했다. 10개 틀렸으니까 200개 써야된다. 슬퍼하는 표정을 지었다. 흥이다. 

강의를 마치자마자 상탄을 하러 왔다. 말도 안되게 피곤한 컨디션이었는데 왠지 총을 쏘지 않으면 하루를 제대로 마감한 느낌이 안든다. 이거 정말 큰일이다. 무튼, 총을 쐈다. 탕탕탕. 클전은 하기 싫고 혼자 공방도 하기 싫은,
- 아, 나 배고파.
- 뭐 먹을래?
- 아무거나.
- 자장면 먹을까?
- 아니. 나 면은 먹기 싫어.
- 그럼 백반 먹을까?
- 아니 밥도 그다지.
- 그럼 피자같은 거 먹을까?
- 느끼한 건 좀 싫으네.
- 그럼 뭐 먹지?
- 아냐 나 별로 배 안고파.
의 까탈스럽고 짜증스러운 여자친구가 된 느낌이었다.

뭐하지, 뭐하지, 뭐하지? 하다가 정우켱이 들어왔다. 맵리하자고 꼬셨다. 정우켱이 '콜!' 이랬다. 같이 맵리를 한 바퀴 돌렸다. 재밌었다. 두 바퀴 돌렸다. 그저그랬다. 세 바퀴 돌렸다. 아- 재미없어. 딸새오빠가 얼른 퀵을 타라고 불렀다. 퀵을 탔다. 데이빗손컴님이 본인이 삽을 푸고 있으니 나보고 업으랬다. '에이, 제가 어떻게요', 했는데 '제라드가 배컴 못업냐?' 고 했다. 당연히, 업죠. 사실 좀 겁이 났다. '똑똑' 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조금 이따 전화가 왔다. 알콜이 조금 섞인 목소리다. 그래도 잠에 취해서 옹알거리던 목소리하곤 다르다. 알아들을 수 있다. 통화를 하겠다고 하고 어택을 갔다. 자란다 채라드. 가는 데로 슝슝슝. 신이 났다. you make me high! 다음 판이 됐다. ssadda. 010을 찍었다. 화가 났다. 또 했다. 또 ssadda. 이럴 순 없어! 문자를 보내고 싶었다. 참았다. 왜냐면 지금까지 안들어가고 피곤하단 사실을 알면 혼날 것 같아서다. 근데 아마 이거 보고 나면 좀 혼날거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뻥은 안치기로 했다. 나 실은 좀 많이 '아~대라~'인데. 버틸만큼 버티다가 '잘자-' 하고 자고 싶다. 집에 가면 그냥 기절해버릴 것 같다. 아- 대라.

내 바보는 노래방에 간다고 했다. 살살 논다고 했지만 분명히 안그럴 거 안다. 뿅뿅 거리는 노래방 반주가 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신나게 놀 거 다 안다. 그리고 브리핑을 하면서 죽어갈 거다. 다 안다. 그래도 사랑스럽다. 왜냐면,

내꺼니까.

잠을 많이 잤으니까 그렇게 피곤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서울 여행도 여행인지라 여독도 안풀린 상태에서 너무 무리할까봐 좀 심술난다. 이 심술은 오늘 말고 내일 내야지. 노는 데 방해할 순 없지. 다 놀고 혼나봐라! 이제 정말 집에 가야겠다. 택시를 타고. 내일도 긴긴- 강의가 날 기다린다. 베터리, 잘 챙겨가야지.

'해보자'는 말이 좋다고 했다. 그게 내 진심이다. 뭐가 됐든 같이 해보자. 어디가 됐든 같이 가보자. 뭐가 나오든 같이 열어보자. 그런 심정이었다. 쉽지 않을 것도 알고 곱지 않은 길임도 안다. 그래도 안해보고 돌아서는 것보다는 같이 보고 같이 겪고 같이 가보고 싶었다. 거기가 어디고 그게 뭐든 같이 하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어렵더라도 같이 눈물흘리는 시간이 기쁠 것 같다.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약속을 세우고 하나씩 지키면서 조금씩 서로에게 익숙해지리라 믿는다. 아직은 잘 모르는 모습들에 놀라기도 하고 즐거워도 하면서 그렇게 익숙해지다보면 우리를 둘러싼 공기와 습기가 친근해지겠지. 그 때가 오면 참 좋겠다. 더 이상 에이롱전을 하며 요구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누리면서 서로가 늘 고마워했으면 좋겠다.

내게 언제나 고맙다는 말을 했는데, 그에 비해서 난 고맙다는 말을 적게 한 것 같다. 사실은 정말 많이 고마웠다. 내게 고맙다고 해주는 것이. 고마움을 고맙다 말할 수 있는 것은 큰 용기다. 미안함을 미안하다 말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만. 변하지 않을 수 없다면, 변함이 아니라 물듬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베푸는 호의와 배려를 당연하다 여기지 않고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좋겠다. 당연한 일이어도 고맙다. 그런 의미에서 밀렸던 고마움을 풀어놓는다.

네가 사는 도시에 고맙고, 네가 머무는 공간에 고맙고, 네가 누리는 기쁨에 고맙고, 네가 겪을 고통들에 고마우며, 네가 나와 함께할 시간들에 고맙다.

너, 라는 사람이 고맙다.

그리고 사실, 정말정말 대다 ㅠㅠ. 더는 못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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